스포츠서울 1992.08.17 ‘한국풍물 新 사진기행 여기는 별천지 “가야산 만수동”편의 기사를 옮겨온 것입니다.
매화.비계.구곡산속 천혜의 2명당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 지금까지 박사 3명 탄생...앞으로"명인"4명 더
비학하전형(飛鶴下田形) : "5대에 걸쳐 높은 벼슬 배출" 무학대사 예언
가야산 남쪽에 그 주위가 200리요 그 안에 만수동이 있으니 가히 만명이 살아갈 수 있는 보길십승지라고 했다. 북쪽으로 매화산을 주산으로 비계산,구곡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동쪽에 덕곡재가 유일한 통로이다.
이 분지내를 통틀어 만수동이라고 하는데 이 만수동에는 두 곳의 명기(명당)가 있다고 한다.
그 명기중 하나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요 또 하나는 "비학하전형(飛鶴下田形)이라고 한다.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매화낙지형"은 매화꽃이 떨어진 곳 같다 하여 예로부터 명당으로 치는데 북쪽 매화산의 지기가 남으로 흘러 만수동 한가운데인 매안리 언덕에서 결국을 했으니 지금 숭산국민학교가 있는 칠성대(七星台)이다. 묘하게도 바위 7개가 마치 북두칠성 형상으로 놓여 있어 칠성대라고 한다.
일제 때 이곳 칠성대에 학교를 지으려고 칠성바위를 제거하려고 바위를 깨던 중에 청천백일 하에 감자기 뇌성번개가 몰아치고 풍세가 요란해서 범상치 않은 바위라고 생각해서 이 칠성대를 벗어나 그 앞에 학교를 지어 지금은 숭산국민학교 후정으로 명소가 되어 있다.
만수동 비기에 보면 "부불과백석 귀불과면장"(富不過百石 貴不過面長)이라 했는데 벼 백석은 한이 없고 한껏해야 면장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이 숭산국민학교에서 박사가 3명이나 나왔는데 칠성바위로 보아 앞으로 4명의 명인이 더 나오리라고 한다.
비학하전형(飛鶴下田形)
또 하나는 학이 날아든다는 "비학하전형(飛鶴下田形)이라는 명기(명당)는 가천리 동구에 있어 활아대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좌청룡은 뚜렸하나 논을 일구느라고 품에 안은 하나의 알봉은 없어졌고 우측 날개 부분도 농토개간으로 파손되고 형국이 변해서 이미 기가 쇠진되지 않았나 하기도 하다. 이 명당은 조선조 이태조의 국사인 무학(無學)대사가 잡아 놓았다고 한다. 그것도 신빙성이 가는 것이 무학대사가 합천 용주면생이니 이 곳을 답산했으리라는 그럴듯한 명당 논리가 선다.
누가 보아도 학이 날아드는 형국에 학의 부리부분이 유별나게 돌출되어 있어 이 곳이 명당이라고 예부터 섣달 그믐날이면 닭이나 학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전해내려 왔다.
35년전 인근에 주씨들이 명당을 찾아 이곳에 와서 답산을 하고 산역을 할 때 산속이 텅빈 것 같이 울려서 이곳은 묘자리가 못된다고 버리고 간 후 바로 그 해 이 고장 가천에 사는 박대옥씨(75)의 부친이 죽어서 묘자리를 멀리 잡아놓고 운구하는 날 갑자기 허리가 묻힐 정도의 는이 쌓여 할 수없이 가까운 곳을 택한 곳이 여기였다. 이 곳에 묘자리를 잡을 때 홍풍수가 정해준 자리가 못마땅해서 상주인 박대옥씨가 조금 위에 쓸 것을 고집하니 홍풍수는 화가나서 도망간 후 원하는 자리를 파던 중 이게 오 웬일인가. 가로8cm 세로 15cm의 오석으로 된 지석이 나왔다.
지석을 살펴보니 앞에는 "時爲鶴上 碑推待後人 五代相公榮華之地"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九l 木 地官無學"이라고 음각되어 있지 않은가. 이를 독해하면 " 때를 위해 학형에 비석을 묻어두니 후인을 기다리는 5대상공 영화지지"라고 새겼고 "지관무학"이라 했다. 이묘의 아들인 박대옥씨(75)는 지금 홀로 고향에 남아 94세의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효자상까지 탄 효자이다. 선인봉길지(善人逢吉地)라 착한자 좋은 땅을 얻는다더니 앞으로 두고 볼 관심의 명당이 될 것인가?
-조덕연 부국장- (도움말 : 합천 이상학 성균관전
[참고사진]
날개를 펼친 학(鶴)이 들판으로 내려오는 지세로, 학의 머리 부리 끝에 박대옥씨 조부산소가 위치해 있다. 무거운 돌로 누르면 안된다고 하여 상석을 놓지 않았다. 그 아래 할아대 들판에 비학하전형 (飛鶴下田形 ) 명기의 완성체인 알봉이 존재했었으나 지금은 농지로 평탄화 되어 보이지 않는다. 박대옥씨 조부상 이후 출토된 지석과 길지(吉地)를 보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약 한 달 동안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지관들이 찾아와 법석였다고 한다. 70년대초 영남대학 쪽에서 출토된 지석에 대해 관심을 보였으나 가족의 거부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우주개발 시대에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는 이가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한 시대 지역사회에 회자되었던 핫한 이슈였다. (伽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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