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전란과 조정혼란,가뭄,홍수 등의 환란을 겪으면서 조선 중기이후 민간의 관심을 모았던 예언서(豫言書) 정감록은 국가 운명과 위기 발생시 안전한 피난처로 십승지를 말하고 있다. 외부에서 그 속을 들여다 보기도 접근 하기도 어려운 격리된 오지이면서도 식수와 식량 등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으로, 보은 속리산, 안동의 화산, 남원의 운봉, 전북 부안의 호안, 무주의 무풍, 강원도 영월, 경북 예천, 충남 계룡산, 합천의 가야산(만수동), 경북 풍기의 차암 금계촌이 그 곳이다.
가야산 만수동(萬壽洞)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전후로 회자되던 길지로 가야산 밑 남쪽에 둘레 200여리 가량의 萬壽洞이 있다는 민간의 기록이 있을 뿐,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구글 3D 지도나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숭산지역이 당시 회자되던 길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고, 실제로 임진왜란 전후로 유입된 많은 성씨들의 숭산지역 문중 족보에도 이주경로가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伽川)
[사진설명 : 비계산 죄측 능선에서 가야산 정상부 조망]
뒤쪽 제일 높은 산이 가야산(1430m)이고 그 앞쪽 산봉우리가 매화산 제일봉(1010m), 그 앞쪽의 넓은 평지가 가야산 남쪽에 위치한 숭산(崇山)지역 사진이다. 숭산은 24개 자연부락이 가야산 남쪽 아래로 좌측은 남산 제일봉(1010m)과 매화산(954m)으로 내려오는 산 줄기, 우측으로는 단지봉(1029m), 우두산(이상봉1032m), 마장재, 비계산(1126m)으로 이어지는 고산준령으로 둘러 싸인 분지형 지세 안에 산재해 있다. 15세기 위대한 도학자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 두 선비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누던 소학당(小學堂)이 이 곳에 있기도 하다. 이 곳을 포함한 가야면 일대는 7년의 임진왜란 와중에도 적에게 침범 당하지 않은 유일한 고장이었다.
[사진설명 : 더내마을의 아침 풍경]
매화산 제일봉(해발1010m)과 마주 보는 비계산 능선(정상해발1126m, 사진 우측의 높은 산능선) 사이에 만수동의 중심부인 더내마을을 사진 좌측 동산 밑에 숨겨둔 형국이다. 제일봉에서 매화산으로 내려오는 좌측 산줄기는 3갈래로 갈라지며 더내마을을 3겹으로 둘러 싸 있고, 제일봉 단지봉으로 이어지는 우측 산줄기는 외곽으로 비계산 큰산줄기, 안쪽으로 날기재에서 안심이로 내려 오는 작은 산줄기가 겹으로 보호 하고 있는 천혜의 지형 속에 있기 때문이다. (伽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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