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향토 역사 이야기

김굉필과 소학당(小學堂)

by 구름달가드시 2022. 10. 4.

소학당과 감나무 고목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서 어모장군 박예손(朴禮孫)의 사위였던 김굉필(金宏弼, 14541504) 19세 무렵 인근 남교의 처가에 거처하면서 작은 서실을 지어 한훤당(寒暄堂)이라 이름하고 독서와 수양에 전념했던 곳이다. 김굉필은 현풍에 세거지를 두고 한양에도 사제를 두어 지낸 김중곤의 손자로 1454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19세 되던해 순천 박씨 부인과 결혼하여 이 곳 인근 남교(쪽다리 마을)의 처가에 거처하게된 것이다. 21세되던 해(1474)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김종직을 찾아가 '소학'을 배우며 안음현(현재 함양군 안의면) 수령을 지낸 정여창(1450~1504)과도 교우하였다. 김굉필의 영향을 받은 조광조 등의 소학정신 실천은 김굉필의 학문이 [소학]에 바탕을 두고 있음으로 이후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소학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조선 성종3(1472) 한훤당(寒暄堂)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연산군 때 사화로 희생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내 선비들이 뜻을 모아 조선 중종 원년(1506)에 사당과 소학당을 건립하였으나 또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숙종22(1696)에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정면 4,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기와집이며 경내 우측으로 강물을 끼고 위치하여 옛 선비들이 공부하거나 가르치던 곳으로 경관이 훌륭하다건물 좌측에 벽진이씨(碧珍李氏)이중무, 안동권씨(安東權氏)권양 순천박씨(順天朴氏)박양좌,박이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회산사(會山祠)가 있다.

 

1985 11 14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되었으며, 진이씨, 순천박씨문중 소유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관리인이 거주하는 민가가 바로 옆에 한 채 있는데, 가축 우리가 함께 있어 옥의 티로 느껴진다.

 

거창 가조면 수월리에 소재한 고만리들을 중심으로 소학당과 관련한 흥미있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고만리 들판은 땅이 기름지고 넓은 평야이다. 앞날에 조씨가 왕도를 정할 곳이라고도 하고, 고만리 숫못 밑에는 대궐뱀이 살고 있다고도 전해진다. 남쪽에는 문계산,서쪽에는 박유산,북쪽에는 금귀봉, 동쪽 에는 가야산의 줄기인 비계산이 동서남북으로 둘러 싸여 있어 그 중심지를 이룬 고만리들은 가히 도읍을 꿈 꿀 만한 지세이다옛날에 중국에서 유명한 도사가 나와서 가야산 부도를 두루 살피게 되었다. 고만리들에 이르러 주위를 관측하니 차후 500년 도읍터가 분명하였다. 시기가 난 중국 도사는 혈맥을 끊어 도읍을 방해했다.

 

고만리들 동편에 있는 가야산 아래에는 숭산 고을이 있었고, 숭산은 당시의 문화 · 교육의 중심 터전으로 소학당이 있었다. 도사는 소학당 · 대학당의 혈을 끊고 광성 마을 앞의 용구시 소의 물길을 끊었다. 소의 물이 마르자, 용은 승천을 못하고 이무기가 되었고 거북은 남해 바다로 갔다.

 

도사는 그에 그치지 않고 비계산에도 손을 댔다. 원래 비계산에는 비계포란의 지형이 있어서 길지 라고 했다. 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었는데, 산맥을 끊어 닭이 날아가는 형국으 로 만들어 비계산이라 부르게 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고민리들을 둘러싼 지형의 지력이 쇠하여 도읍이 형성되지 못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iN, 편집:(伽川))

 

 

수령 수백년의 느티나무와 정자각 옆의 소학당 지동암
쪽다리 마을 개울가 방향에서 본 소학당 지동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