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억 속 여행

유년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 그리고 더내 향우회

by 구름달가드시 2022. 10. 5.

1960년대 농사가 모든 것이었던 시절, 50호가 넘는 마을에 200여명이 함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모내기 철이면 천수답 물 싸움으로 바람 잘 날 없었지만, 큰 일이 생기면 마을 어른들은 한 집처럼 뭉쳐서 일을 해냈다. 마을에서 해마다 공동으로 주관하는 당산제, 지신밟기,달집 그슬기, 삼삶기가 가장 큰 주요 행사였다.

 

마을에서 큰 셈 터로 가는 길목에 작은 도랑을 끼고 1년에 단 한 번 사용하는 '삼삶곳'이 있었다. 지금은 대마 재배가 법으로 규제되고 있지만 그땐 제한 없이 대마를 재배 할 수 있었다. 대마 껍질을 벗기기 위해서는 증기로 쪄야 하는데, 어른 키 보다 더 큰 대마를 개인 집 가마 솥에서 쪄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어른들은 이 곳에 큰 아궁이를 만들고 구들을 놓고 그 위로 자갈을 두텁게 깔아 100% 자연식 '삼삶곳'을 만들었다. 그 위에 거적대기를 깔고, 베어 온 삼(대마)뭉치를 세운 후, 또 거적대기를 덮어서 증기의 유실을 막았다. 이렇게 기초작업이 완료되면 아궁이에 장작불은 지핀다. 도자기 가마불 때듯이 오랜 시간 자갈더미를 데운다. 드디어 물동이의 물을 뜨겁게 데워진 자갈더미 위로 붓기 시작한다. 동민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릴레이 식으로 '삼삶곳' 위로 물동이를 전달한다. '쿠구구궁' 굉음을 내며 뜨거운 증기가 솟아 오른다. 대마가 삶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삶아낸 대마는 집집으로 옮겨져 껍질을 벗기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벗겨낸 대마껍질은 실을 만들어 삼베를 짜 입었고, 속살을 더러 낸 하얀 삼대는 보관해 두었다가 집을 지을때 건축용 재료로 사용되었다. '삼삶곳' 작업이 끝나도 데워진 자갈의 열기는 한동안 지속되는데, 이 잔열을 이용하여 아이들은 감자를 구워 먹었다.

 

농삿일에 막걸리 만한 에너지원이 또 있으랴! 집집이 누룩을 장만해 두고 막걸리를 만들어 농주로 사용했는데, 읍에 하나 있는 술도가(막거리 제조장)에서 막걸리 매출이 떨어지면 세무서로 진정을 넣어 밀주 단속원이 마을을 급습하기도 했다. 사소한 일로 시비가 발생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밀주 단속원'이 출현하면 돌담 너머로 누룩 소쿠리를 서로 숨겨 주며 살았다.

 

돌담 위로 제사음식의 정이 오가기도 했고, 별 것도 아니지만 기밀스런 이슈가 생기면 돌담을 타고 정보가 오가기도 했다. 숨길 것도 없고 속일 수도 없는 공동체 같은 삶인지라 누구 집에 송아지 한 마리만 낳아도 그게 큰 뉴스거리였다.

 

이 때는 식구 많은 집이 그렇게 부러웠다. 농사철엔 일꾼 많은 집이 최고였다. 발로 밟는 탈곡기가 막 나온 무렵, 동네에 한 두 대 밖에 없으니 베어내 말린 볏단을 묶어 놓고 탈곡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늦은 밤에 순번이 되면 달빛 속에 그 좁은 마당에서 탈곡작업을 하였고 일손이 부족하니 아이들은 볏단을 날랐다. 그렇게 볏단을 나르다 탈곡 후 던져진 볏집단 속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온통 껄꺼러운 티끌 범벅인 볏집단 속이 그땐 그렇게 포근 할 수 가 없었다.

 

감자가 수확되면 대청 마루 밑에 넣어 보관하였다. 쌓여진 감자 더미 속에서 장마철에 썩어서 상한 감자가 발생하면, 어머니들은 가려내어 체로 쳐서 감자떡을 만들었고 아이들은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70년대 부터 우리 사회가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하나 둘씩 새로운 꿈을 찾아 마을을 떠나는 가구들이 생겨났고, 객지에서 학교를 졸업한 아들 딸들도 고향으로 돌아오진 않았다. 그리고 귀성전쟁이란 말이 생겨났다.

 

옛날엔 마을에 초상이 나면 슬픔 속이지만 사실상 마을잔치였다. 긴 만장 행열과 상여꾼, 상여소리, 상주들, 조문객과 구경꾼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은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있다. 이마저도 작고하는 분들이 늘어나, 어느새 상여꾼 최소인원 확보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동내엔 어린아이 울음 소리가 그쳤고, 1,000명이 뛰어 놀던 학교는 몇 년 전부터 폐교설이 흘러 나왔다.

 

김진중(향우회 초대회장)을 비롯한 고향을 걱정하는 이들이 뜻을 모았고 고향을 떠나 살던 사람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미 활동중인 또래별 모임을 기반으로 파악된 만30~55세 청장년 남자들이 97명이나 되었다.  이 중에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8명뿐이었고, 대구경북지역에 43명, 서울경기,강원지역에 18명, 부산,경남지역 26명, 기타 2명으로 타지 각처에 산재해  살고 있었다.  

 

1996년4월18일, 가천리 더내 향우회가 조직되고 드디어 창립총회를 열게 되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추억 속의 인물들, 다투기도 헸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사람들과 연결되었고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향우회의 사업목적은  "친목도모, 상부상조, 고향발전에 기여"로 정했다.  이후 매년 5월이면 향우회 주관으로 어버이날 사은행사를 가지게 되었고 근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2003년11월23일에는,  향우회에서 그 시절 우리 부모님들의 아들사랑에 항상 뒷 그늘에서 양보만 하며 살아야 했던 딸들을 초청하여 아들들이 미안함을 전하고 고마움을 표하는 '고향의 날' 행사를 가졌다. 대상 인원은 56명으로 파악되었다. 어려서는 아들사랑에 밀려 살았지만 , 커서는 객지 나가 번 돈을 꼬박꼬박 집으로 보내며 효를 다했던 딸들이었다. 결혼 해서는 남편과 자녀 뒷바라지에 바쁘게 살아 왔지만 고향 사람들을 잊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억 속 인물들과의 재회에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날 행사에 참석 못할 사연을 가진 남동생의 회비를 대납하려는 한 누이가 있었다. 눈 가에 눈물이 베어 있었다. 누이는 장성해서 일가를 이룬 남동생을 아직도 엄마의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이제는 이미 작고하신  회원들도 생겨났고, 뿌리 내린 타관객지에서  아이들의 새로운 고향을 이뤄 주고 있겠지만, 마지막 농경시대에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애절한 향수는 아마 생명이 다해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伽川)

 

오래전 큰 도로로 변해버린 유년시절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들길

 

가천리 더내향우회 창립총회 (1996년). 마을어른 대표 두분이 향우회장에게 향우회기를 내려 주고 있다.

 

1997년5월 더내마을 어버이날 행사. 세대별로 순서를 정해 마을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있다.. 훗날 이 장소에 가천리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가천리 더내 향우회 심벌

'추억 속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새끼줄 꼬기  (0) 2022.10.06
가설극장  (0) 2022.10.06
산골 "콩쿨대회"(노래자랑)  (0) 2022.10.06
관솔불  (0) 2022.10.05
겨울 이야기  (1) 2022.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