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마을 영웅의 일생
백부는 젊어서 부터 대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산촌마을의 가장으로 살아야 했다. 임진왜란 때 제사 지낼 후손으로 선택되어 십승지(十勝地)로 들어 온 11대 조부는 이 땅에 정착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 벼슬살이 까지 하였다. 그러나, 후손들이 도박놀음으로 전재산을 탕진하게 된 이후 부터 가난한 산골 농삿꾼으로 힘든 가계가 대물림 되어 왔기 때문이다.
젊어서 생긴 위장병으로 일도 못하고 골방 노인이된 53세 아버지와 부지런하지만 평범했던 42세 어머니,줄줄이 아래로 열여덟,열두살 남동생 2명에다 아홉살,다섯살,세살,한살박이 여동생 4명의 생계가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고, 할수 있는 일이란게 지게짐이나 남의 집일 해주고 곡식 몇 박 얻어 오는 일 밖에 없었던 시절, 백부 나이는 겨우 스물한살이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문맹이었던 터라, 가족 중 누구 하나는 글 눈을 띄워야 한다고 생각한 백부는 지게짐과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막내 남동생 하나만은 소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국민징용령을 내려 전쟁물자와 전쟁노동력 조달에 나선다. 수탈정책으로 더욱 피폐해 가는 소작농의 1년 농사로는 봄이 오기도 전에 양식이 바닥났다. 말려두었던 나물과 보리 싹을 베어 죽을 끓여 먹으며 굶주림의 보리고개를 이겨내야 했다.
백부에게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설흔여덟 작은집 숙모가 무능한 숙부와 아이 셋을 두었으나 먹고 살길이 막막하자 가족을 산촌마을에 두고 십리 거리 장터 입구에 주막을 차린 것이다. 그러다 면사무소를 드나들던 아랫동네 이장과 장터 주막에서 사실상 동거하게 되었고, 또 아이를 낳았다. 소문이 온동네 마을로 퍼져 수군거렸지만 누구 하나 나설 가족이 없었다. 두살 아래 '사촌동생'은 어머니의 일이지만 숙맥이라 속만 끓였지 굶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며 사는 위인이었다. 결국은 백부가 나서야 했다. 집안 망신이라며 주막집을 찾아가 이장을 끌어내는 소동을 부렸다. 국민징용령이 내려지자 일제 강점기 마을 이장은 백부를 보복 징집하여 홋가이도 탄광 보국대로 보내 버린다.
남은 가족의 생계를 '둘째 동생'의 몫으로 남겨둔 채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앞에 혹여 돈이라도 좀 벌 수 있는 기대로 위안하며 고향을 떠난다. 혹독한 노동환경에 살이 터지는 고생과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겼다. 스물다섯에 해방을 맞았고 목숨만 부지한체 빈손으로 귀국한다. 그리던 고향이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히 지독한 가난과 대가족 부양의 무거운 짐 뿐이었다.
백부 나이 설흔에 6.25가 발생하였다.
인민군이 비계산 옆으로 뚫린 도로를 통해 산촌마을까지 들어왔고 가족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인민군의 강제징집으로 백부(伯父)는 '둘째동생'과 함께 지게로 탄약을 지고 나르는 탄부로 사선을 넘나들었고, 스물한살 '막내동생'은 낙동강 전선에 노역부로 투입되었다. 낙동강을 건너 대구를 점령하려는 인민군들이 끊어진 다리를 잇기 위해 야간에 필사적인 공사를 벌이고, 날이 밝으면 또 미군기의 공습으로 파괴되는 일이 반복되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아랫 동네 살다 같이 징집된 동료 "서"씨가 파편에 다리를 크게 다치는 부상을 입게 되자, 인민군 책임자가 노역장에 부담만 주는 부상자 서씨를 데리고 돌아가라 하여 전쟁 중에 '막내동생'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인근 사찰에 주지로 있던 먼 친척은 사찰에 머물던 인민군 부대에 밥을 해준 죄로 수복 후 국군에 의해 처형당한다. 온 집안이 전쟁의 아픔을 겪어내야 했다.
백부나이 설흔여섯에 국군에 입대중인 스물일곱살 '막내동생'을 결혼시켰다. 농번기가 지나면 곡식 몇 되라도 구하기 위해 뗄감나무를 해서 여러 장터에 내다 팔기도 했는데, 4시간 산길을 걸어 해발 1천미터 고개 넘는 시골장을 다니다가 장터에서 오가던 혼담으로 '동생'을 장가 보내게 된 것이다. 백부는 까막눈이지만 신부가 소학교를 나오고 공부도 잘했다고 하니 '막내동생'의 배필로 손색없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번 돈으로 괜찮은 혼수용 장농을 사서 짊어지고 집으로 오는 길이 그렇게 좋았다고 했다. 몇 년 후 본가 아랫 밭에다 근사한 새 집을 지어 '막내동생'을 분가 시켰는데, 그 자리에 50년 후 지금의 산방이 새로 들어서게 된다.
사십대 들어 산골 농사로는 가난을 면키 어렵다고 판단한 백부는 선산만 남겨 두고 전답을 처분하여 40km떨어진 인근 읍내로 이사하여 쌀집을 열었다. 백모는 가게를 보고 백부는 밭을 일구어 파,참외,수박 등을 키워 팔았다. 오일장이면 장터에도 가게를 열고 곡식을 사고 팔았다. 잠시도 쉬지 않는 부지런함으로 집도 사고 밭도 매입해서 재산을 계속 늘려갔다. '동생'들도 모두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고 각자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으니 이 즈음이 백부의 일생에서 가장 좋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백부와 백모는 '외아들'을 끔찍히도 사랑하였다. 그러나 방식이 서로 달라 대구에서 유학하던 아들이 집에 오면 늘 언쟁이 벌어졌다.백부는 귀한 아들이지만 삶의 터전인 농삿일도 알아야 한다며 밭일을 시키고 싶어 했고, 백모는 금쪽 같은 '아들'에게 머슴일을 시킨다며 '외아들'을 감쌌다. 손을 데면 베일 정도로 교복 바지에 주름 각을 잡고, 파리가 미끌어질 정도로 광을 낸 구두를 신고 온 '외아들'에게 백부는 "아버지 하는 일 도와야 한다"며 '똥구르마'를 밀어라고 시켰다. 그때는 재래식 화장실 인분을 통에 퍼 담아 리어카로 운반하여 밭에 뿌려 거름으로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외아들'의 미래는 온 집안의 희망이었다. 대학 입시고사를 한 달 앞둔 명절차례 자리에 나오지 않아도 어른들은 공부하는데 고생한다고 그냥 두라고 만류하곤 했다.
설.추석 양 명절이면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하루 전날 저녁에 버스를 타기 위해 10리 길을 걸어와 또 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의 큰 집으로 모여 1박을 하고 명절 아침에 차례상을 차렸다.차례상에도 술을 세 잔을 올려야 하느니 명절은 단잔이니 한 잔만 올리느니 하며 형제간에 입씨름이 벌어지긴 하였지만 십수명이 세대별로 늘어서 절을 올리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큰 집 차례가 끝나면 6촌집으로 이동하여 차례가 이어지고 오후쯤 되어야 차례행사가 끝났다. 명절 차례는 집안의 년중 가장 큰 행사였고 혹여라도 사정이 있어 불참하면 큰 죄인이었다. Y대학 영문학과를 입학해서 외교관을 꿈꾸는 '외아들'은 온 집안의 희망이었기에 이런 행사에서도 참여를 면제 받았던 것이다.
'외아들'은 대학 2년차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입영을 앞두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다 실패하고 병역 기피가 되고 만다. 공무원의 길은 차단되었고, 가업인 쌀가게를 이어 받았으나 타산적이지 못한 성격이라 애초부터 장사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다 백모가 간경화로 입원치료를 시작하게 되었고 의료보험 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병원비로 어렵게 모은 재산까지 처분 하였으나 끝내 별세하고 만다. '외아들'의 슬픔은 극에 달하였다. 출세의 꿈이 꺾여 버린 신세 한탄과 애끓는 사모곡으로 막걸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사람이 없어지면 100리길 고향 선산 어머니 산소 앞에 엎드려 울고 있는 현장으로 발견되곤 하였다.
백부와는 원래부터 뜻이 맞질 않았고 몇 마디의 대화도 이어가질 못하는 상황이 몇 년이나 계속 되었다.그 후 백부가 재혼을 하자 부자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고, 증조부 재삿날 저녁 재삿상을 차려 두고는 '외아들' 내외가 사라졌다. 다음 장날에 써야 할 장농 속의 장사 밑천 삼백만원도 함께 없어졌다. 밭일로 까매진 피부의 백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가출 한 달여 후 '외아들’이 고향의 막내 삼촌'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돈이 떨어졌고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막내 삼촌'이 발신지를 근거로 대구에 은거하던 '외아를' 내외를 찾아 데려왔다.
백부는 더 이상 한집에 아들과 함께 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방7칸의 살던 집과 소중한 쌀가게를 아들에게 물려주며 대신에 '노모'봉양을 맡겼다. 그리고 장터 입구에 작은 점포와 방1칸을 세 얻어 나왔다. 대면할 기회가 없어지자 부자간의 갈등을 사라졌으나 '외아들'이 물려 받은 재산은 갈수록 줄어 들고 빚은 늘어 갔다.
세월이 흘러 고향에 남아있던 두 '동생'이 백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기력도 예전 같지 않자 백부는 귀향을 준비하게 된다. 아들 내외 집에 있는 '노모' 봉양 문제도 해결 할 요량으로, 떠나 온 고향마을에 빈집 하나를 미리 사두었다. 재혼 백모는 이 나이에 또 농촌살림으로 고생하기 싫타며 귀촌을 거절하였다 했다. 결국 재혼 백모와 결별한 후 제2의 인생에 소중한 원천이었던 오랜 장삿생활도 청산하였다. 그리고 수십 년 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떠나 왔던 애환의 땅 고향마을로 1988년11월 백부는 구십 노모와 함께 백발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홋가이도 탄광 강제징용 조차 이겨낸 강인한 힘으로 고향에서 농사도 짓고 집안 일 정리도 시작하였다. 특히 이산 저산에 흩어져 있는 조상들의 묘를 한 곳으로 이장하는 일이 생애 마지막 숙제였다. 내가 죽으면 누가 산소를 찾아 돌보겠는가? 후손들이 돌보기 쉬운 가까운 선산으로 이장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틈틈이 이장(移藏)을 하였다. 시간이 나면 일꾼도 없이 홀로 마른 명태 1포에 소주 한 잔으로 파묘를 고(告)하고, 남은 유해와 흙을 파서 담은 봉지를 바지게 위에 올리고 억새를 베어 덮은 후 지게짐으로 이동하여 선산에 묘를 만들어 갔다, 동네에서는 택일도 없이 함부로 이장한다고 수군거렸으나 백부는 개의치 않았다.
백부나이 71세에 알콜중독으로 인한 간경화로 '외아들'이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창시절 구르몽의 시를 좋아하던 낭만파였지만 집안의 종손으로서는 참으로 못난 '외아들'의 인생이었다. 어린 두 손자와 빚더미를 떠안은 며느리는 정말 힘든 삶을 살게 된다.
그후 2년이 되는 해, 백부가 속이 몹시 좋지 않다고 하여 건강검진을 받게 하였는데 위암이었다. 병원에서는 입원수술과 치료를 권유하였으나 백부는 나중에 오겠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그냥 견디었다. 아무런 치료도 진통약 조차도 쓰지 않았다. 모아 둔 마지막 재산을 또 다시 병원에 갖다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백부가 나를 몹시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밤중에 급히 고향으로 들어갔다. 눈가에는 말랐다가 덧 씌워진 눈물 자욱이 진하게 베어 있었다. 얼마나 힘든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 백부는 힘이 다 빠진 손으로 봉투 2개를 내어 놓았다. "깊이 간직해 두었다가 삼백만원 봉투는 노모가 별세하면 장례비로 쓰고 , 천사백만원 봉투는 어린 손자들이 크면 전해주라 "하였다. 맏아들은 남은 걱정을 그렇게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젊은 시절 대 가족의 생존과 삶의 무게, 시대의 고통을 온 몸으로 버티며 살아 왔던 '맏아들' 그는 집안의 영웅이었다.
4년 후 조모는 98수로 별세하였다. (伽川)